영화 <기생충> 속 ‘기택’에게 배우는 인간관계 경계 설정법
"호의는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영화 <기생충>의 이 대사, 혹시 기억하세요? 저에게는 마치 뇌리에 박힌 듯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너무나 공감되는 대사였기 때문이었는데요. 살면서 '착한 게 죄가 되는' 아이러니한 관계들을 꽤 많이 경험했거든요. 진심으로 누군가를 도왔는데 오히려 그 친절이 당연시되거나, 심지어는 저의 선의를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영화 <기생충>속 '기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삶의 중요한 기술인 인간관계에서의 경계 설정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착한 사람은 왜 손해를 볼까? – 기택이 보여준 관계의 함정
영화 속 기택은 박 사장 가족에게 끊임없이 낮은 자세를 유지합니다. 상대의 경계를 넘지 않으려 조심하고,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하며, 항상 비굴할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기택의 이런 모습이 부잣집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현명한 처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의 과도한 조심성은 결국 독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박 사장 가족은 기택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를 점점 더 하찮고 '선을 넘어도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죠. 이것이 바로 "호의는 계속되면 권리로 착각된다"는 말의 본질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한 조별 과제에서 늘 총대를 메고 자료 조사를 도맡아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고마워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가 자료를 찾아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더군요. 심지어는 "OO아, 다음 주 발표 자료도 네가 좀 준비해 줘. 네가 제일 잘하잖아"라며, 제게 아무런 의논도 없이 다음 과제까지 떠넘기려 할 때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거래 분석 이론'을 주창한 심리학자 에릭 번의 말처럼,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상하관계'를 만들며 상호작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택은 자신을 '을'로 위치시킴으로써 박 사장 가족이 자연스럽게 '갑'의 자세를 취하도록 만든 셈입니다. 저 역시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를 반복하다가 결국 '편한 사람'이 아니라 '만만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르네요. 관계에서의 명확한 선 긋기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2. 경계 없는 관계는 결국 피로해진다
기택 가족은 영화 초반, 박 사장 가족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서로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고, 마치 가면을 쓴 듯 위장된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경계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결국 역할과 책임, 심지어는 감정까지 뒤섞여 버립니다. 그 무너진 경계는 결국 영화의 마지막, 비극적인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경계 모호성(boundary ambiguity)'이라고 부릅니다. 관계에서 서로의 역할이나 한계를 명확히 하지 못하면, 감정노동은 한쪽에 쏠리게 되고, 작은 오해나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큰 갈등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저는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이런 경계 모호성 때문에 지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매번 제가 먼저 약속을 잡고, 친구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들어주며 감정적으로 지지해 주었죠. 처음엔 '친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친구는 제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답이 없고, 자신의 문제만 이야기할 뿐 제 고민에는 귀 기울이지 않더군요. '이건 부탁인데, 이건 요구야'라는 구분이 없을 때, 상대방도 본인도 피로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기택의 비극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우리는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인지 먼저 정해야 한다"고요. 관계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내가 지킬 선은 내가 그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거절하면 나쁜 사람 될까 봐', '이 관계가 깨질까 봐' 혹은 '상대방이 서운해할까 봐' 스스로의 선을 넘기는 것을 허용합니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킬 기준을 명확하게 갖고 있느냐입니다. 영화 속 기택은 자신의 불만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가, 결국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고 맙니다. 감정을 제때 표현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하고 싶은 말도 꾹 참으면, 결국 그 쌓인 감정은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결국 더 큰 감정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이는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진실 중 하나입니다.
저는 과거에 직장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주말까지 반납하고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거절하면 찍힐까 봐',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결국 회사에 대한 불만만 커지고 저 자신이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엉뚱한 동료나 가족에게 튀어 나가곤 했습니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경계를 명확히 지키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타인에게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 에너지를 진정으로 소중한 관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한계를 존중받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이 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 '거리를 두는 것'은 차가운 일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은 계급이나 빈부 격차만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우리가 삶에서 놓치기 쉬운 관계의 권력과 적절한 거리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기택의 행동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를 보면서, "나는 지금 어떤 관계에서 나의 선을 넘기고 있진 않은가?", "혹시 나의 호의가 누군가에게 권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착함'은 분명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착함은 오히려 관계를 병들게 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때로는 냉정해 보이는 '거리를 두는 것'이 사실은 건강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계신가요? 혹시 마음속에 '선을 넘는 사람'이 떠오르신다면, 그건 지금이야말로 관계의 거리 조절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존중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